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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문학의 효시자 기봉 백광홍(白光弘, 1522~1556)

기봉 백광홍
주소
안양면 기산리 772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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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1
이용시간
상시
이용요금
무료
주차시설
주차장 없음

선생은 우리 국문학사에 기행가사(紀行歌辭)의 효시를 남긴 분이다.
선생의 호는 기봉(岐峰)이고 안양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본디 타고난 성품이 총명영특하고 배움에 슬기로웠고 지혜로웠으며 우의가 돈독하였다. 어려서 일재 이항(一齎 李恒)에게 글을 배우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율곡 이이(栗谷 李理) 영천 신잠(靈川 申潛)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송강 정철(松江 鄭澈)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고죽 최경창(高竹 崔慶昌) 등과 교류하고 종류하면서 문재와 학덕이 크게 완성되었다. 공은 1549년(명종4) 28세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고 1552(명종7) 31세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호남과 영남의 문신으로서 성균관에서 시재(試才) 겨루기를 하게 되자 기봉이 시부동지(時賦冬至)로 으뜸을 차지하여 선시(選時) 10권을 특사 받았고, 다음해에 호당(湖當)에 선발되었다. 1555년(명종10) 34세 때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서도(西道)의 국경방비 지역에서 민폐를 보살피며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1556년 (명종11) 나이 35세에 병환이 생겨 평안도 평사 자리를 내어놓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 전북 부안 사위의 집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선생은 한시인(漢詩人)으로서 보다 관서별곡에 의해 가사문학가로 더 유명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함께 교류관계를 가졌던 고죽(孤竹)은 선생의 관서별곡을 접하고 다음과 갖이 읊었다.

錦繡煙花依舊色 수놓은 비단같은 아지랑이 속의 꽃은 옛모습 그대로이고 綾羅芳草至今春 능라같이 부드럽고 꽃다운 풀은 오늘도 봄이로구나 仙郞去後無消息 신선같은 그대 떠난 뒤 소식이 없으니 一曲關西淚滿巾 한가락의 관서별곡에 눈물이 수건에 가득하여라

이렇듯 당시 관서별곡에 대한 칭찬이 잦았으나 일찍이 세상을 떠남으로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 선생의 관서별곡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5년을 앞서 불려지고 두 선생간에 교류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관동별곡을 짓는데 구성과 표현수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관서별곡과 관동별곡의 첫머리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관서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제
행장을 다사리니 칼하니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너머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랴

* 관동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었더니
광동팔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들이달아 경회남문 바라보니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앞에 섯다

안양면 기산리 772

최종업데이트
2024.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