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인님께
- 작성일
- 2001.04.13 09:50
- 등록자
- 김OO
- 조회수
- 2375
경주인님께서 말씀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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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모가대와 우기나와 함께 남산으로 말을 타고 올라갔다. 남산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에는 명활산, 서쪽에는 옥녀봉과 선도산이 길게 뻗쳐 있었고, 시가지에는 서천, 남천, 북천의 세 줄기 냇물이 비단 폭이 널린 듯하였다. 세 화랑은 신라의 훌륭한 인물이 되고자 약속했고,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세화랑은 남산 밑으로 내려와서 북문 밖에 있는 술집에 들렀다. 그 술집에는 젊은 기생이 하나 있었는데, 천관이라 하였다. 천관은 매우 영특해 보였다. 김유신은 그 뒤부터 천관이 있는 술집에 자주 들렀고, 김유신은 한낱 기생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천관으로 부터 많은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그러한 행동을 못 마땅해 하셨고, 김유신으로 부터 다시는 천관녀의 집에 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어는 날, 김유신은 잔치집에 초대를 받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말을 탔는데, 술에 취한 탓에 김유신은 말 위에서 흥얼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말은 저 혼자서 뚜벅뚜벅 걷다가 어느 집 앞에서 멈추었다. 김유신은 퍼뜩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 본 김유신은 정신이 번쩍 났다. 그곳은 천관의 술집 앞이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주인의 뜻도 모른다고 하여 오랫동안 함께해온 말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갔다. 얼마 뒤에 천관은 머리를 깎고 중이되었다가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뒷날,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곳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천관사지는 오릉 동쪽, 논 가운데 터만 남아 있습니다.
(자료출처 : 신라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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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아닌 전설이나 민담,설화 등에는 비합리성과 비과학적인 것이 대부분이며 거기에는 어떤 근거나 증명(證明)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장흥에 천관산(天冠山)과 천관녀(天冠女)에 대한 전설은 어제 오늘에 이르러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며, 또한 어느시대, 누가,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알아낼 방법도 없습니다.
'경주인'님께서 적어주신 내용은 웬만한 사람은 모두가 알고있는 내용이고 장흥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즉, 말의 목을 벤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장흥군 대덕읍과 관산에 걸쳐 있는 천관산(天冠山)은 해발 723미터로 호남 5대 명산으로 손꼽는다. 옛날에는 지제산(支提山) 천풍산(天風山)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천관산으로 부른다.
佛書에 '지제산은 천관보살'이 사는 산'이란 기록이 있다.
이 기록과 관련하여 신라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에 사랑했던 천관녀(天冠女)가 숨어 살았던 산이라고 한다. 김유신이 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천관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 백마의 목을 베고 오직 무예에만 열중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는데, 이때 김유신에게 버림을 받은 천관기생은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암자를 짓고 숨어 살면서 김유신의 성공을 빌었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이 경주로 돌아가다가 천관녀의 소식을 듣고 암자를 찾아갔다. 김유신은 천관녀를 만나 함께 경주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으나,
"소첩과 장군의 인연은 소첩이 기생이었을 때 뿐입니다. 사실 소첩은 천관보살이 화신한 몸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시킬 사람을 찾던 중 장군이 적임자라 여겨져 시험한 것인데 역시 큰 일을 이룰 사람이라 소첩과 인연을 끊었으므로 제가 할 일은 이미 마친 것입니다"
말을 끝낸 천관녀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니 홀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를 타고 서쪽을 향해 사라졌다. 김유신이 그녀를 놓칠새라 말을 타고 뒤쫒았는데 결국 장흥의 천관산에 이르러 그녀를 잃어 버렸다. 이 때문에 천관산에 천관보살이 살고 있다고 전해온다.
참고로 제가 알기로는 경주에 있는 천관산은 장흥의 천관산과 한자의 표기가 다른 것으로(天官山) 알고 있으며, 천관녀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기생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을 돕던, 요즘으로 말하면 무당이나, 단골의 일을 했던 직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당연히 화랑들과의 접촉이 빈번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고 '사건'도 있었지 않았겠냐 하는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가 되기를 바라오며 저는 문화와 문학에 관심이 많은사람으로 장흥군의 공식적인 답변이 아님을 밝힙니다. 장흥군민의 한 사람으로 장흥군에 보여주신 '경주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