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서법 예술회... "갈 곳이 없다"
- 작성일
- 2001.04.16 22:01
- 등록자
- 장OO
- 조회수
- 2294
[ 2001/04/16 10:33:29] - 조회수: 29 -
'장흥서법예술회·장흥주부한문대학' "갈곳이 없다"
건물소유주 부도로 전세금도 못받고 이사가야 하는 처지
회원회비와 무료강좌로 운영되는 문화동호회, 도움 절실
중앙로 한전 맞은편, 성경의원 2층에 가면, <장흥서법예술회·장흥주부한문대학> 현판이 걸려있는 20여평 남짓 아담한 문화공간이 있다. '서법·대학'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이곳은 '붓글씨와 학업'의 전당이다. 그러나 이곳을 일컬어 따로 '문화공간'이라 이름하는 것은 단순히 '붓글씨와 학업'을 연마하는 곳이어서만이 아니다.
장흥서법예술회가 창립된 때는 1986년 2월. 서법회 창립의 주역이자 장흥서법예술회와 장흥주부한문대학의 '좌장'격인 이봉준(52세·장흥읍 향양리)씨의 문화적 헌신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서도의 불모지 장흥에서 대중적인 의미의 '먹색 꽃'이 이때부터 피어나기 시작했고, 문화적 갈증으로 목이 타던 서예인, 주부들은 이 공간들을 드나들며 예술혼과 배움의 꿈을 키워 그 목마름을 해소했다.
장흥주부한문대학에서는 한문·교양·국민윤리 등을 강의하고 수강한다. 1994년부터 7년째, 12기 300여명의 주부들이 필업했고, 지금 13기 강의가 한창이다. 그래서, 남도의 끝자락, 한적한 소읍의 문화적 안목이 이곳으로 인하여 한단계 상승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적잖은 성과도 있었다. 1986년도부터 1990년도까지 매년 '장흥서도회원전'을 열어 지역사회에 품격 높은 글씨와 문인화 등을 선보였으며, 500여명의 초·중·고교생이 이곳에서 글씨를 통한 마음의 정화를 수련했고, 제도교육이 담지하지 못한 한문의 묘미를 전수받기도 했다. 또 역량있는 서도회원들이 중앙과 세계 무대에 진출하여 장흥의 이름을 드높인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장흥서법예술회>와 <장흥주부한문대학>을 두고 장흥문화의 메카(성지)라고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평가다.
놀라운 점은 이처럼 왕성한 문화활동이 그 어느 곳의 지원도 없이 모두 이봉준씨의 사재와 <장흥서법예술회>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된다는 사실이다. <장흥주부한문대학> 또한 '무료강좌'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 문화창달이라는 목적 이외의 어떠한 사욕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 문화동호인들의 집합체, 그이들의 공간이 바로 <장흥서법예술회·장흥주부한문대학>인 것이다.
그러나 <장흥서법예술회·장흥주부한문대학>은 지금 위기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장흥을 대표하는 종합병원 원장이기도 했던 문모씨의 파산으로 말미암아 문씨 소유인 同건물이 경매에 넘어가 <장흥서법예술회·장흥주부한문대학>은 갈 곳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삿짐을 챙겨야 하는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경매로 말미암아 이봉준씨가 빚으로 마련한 전세금을 찾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필력을 가다듬고자 하는 서예인들의 열정과 한 글자라도 더 배우고자 발을 동동 구르는 주부들의 간절함을 받아줄, 그리 크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장흥땅에는 없는 실정이다.
<장흥서법예술회·장흥주부한문대학>은 이봉준씨의 개인사무실에서 유림회관으로, 다시 이씨의 개인사무실(현재의 건물)로 벼루와 책을 싸고 옮겨다닌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1997년, 공공의 건물이나 다름없는 장흥유림회관이 그 본래의 기능을 져버린 채 '임대업'으로 전락, 학업의 터전 옮겨야 되자, 당시 장흥주부한문대학생 일동은 '공간마련'을 위한 애절한 호소문을 군 당국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군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자, 이곳 사무실로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는 문화장흥을 꿈꾸고, 실천해온 15년여의 기간동안 이들 순수자생단체는 한번도 지역사회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봉준씨는 붓과 분필이 놓일 수 있는 한 칸의 교실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은 지역사회의 현실에 난감해하며,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어려운 와중에서도 이씨는 "지역사회에 조금이라도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당초의 마음가짐을 버리지 않고 5월 초순에 치를 '사자산 산신제'를 준비하고 있다. 1994년부터 시작한 '사자산 산신제'는 금년이 여덟 번째이며, "장흥군민의 안녕과 번영의 기원"이 그 목적이다. 한편 <장흥주부한문대학> 제6·7기생들은 지난 1998년 식목일을 기하여 장흥예양공원을 푸르게 가꾸고 아끼자는 뜻으로 녹차씨 한 가마니를 파종하여 지금 90% 이상 새싹이 돋아 나고 있다.
이처럼 아무런 조건도, 어떠한 사욕도 없는 순수문화동호인들이 자기연마와 지역봉사라는 두 축을 욕심없이 추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앞으로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부하고 활동할 도장 한칸을 마련하지 못하여 <장흥서법예술회·장흥주부한문대학>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버린다면, 그 자체로서도 슬픈일이겠지만, 지역사회에는 실로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김원우님께서 말씀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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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타지에서 생활해도 항상 고향을 생각하고 그리워 하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중 고향이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문림의 고장, 의향의 고장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장흥이 문림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현재 문화의 향기를 느끼기는 옛 유적이나 유물 그리고 인물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실지로 장흥이 이런 좋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문화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배달된 장흥신문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앗습니다.
이봉준선생이 너무 많은 시간동안 희생하며 일궈놓은 장흥문화의 싹이 자라지 못한다면 장흥의 문화는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장흥서법원과 주부대학에 대한 공간이 군차원에서 마련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줬으면 합니다. 또 공공예산도 이런곳에 지원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어느지역을 가나 자신들의 지역문화를 살리려고 수많은 예산을 사용하면서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장흥문화가 융성해질 수 있도록 장흥서법원.주부대학을 살리는데 군민들과 출향인사들이 함게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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