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인님 고맙습니다
- 작성일
- 2001.04.25 23:28
- 등록자
- 김OO
- 조회수
- 2337
경주인님께서 말씀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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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서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몇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장흥 천관산의 천관보살은 부처님과 관계된 인물이고, 천관보살은 김유신과 관계되는 천관녀가 아닙니다. 또한 장흥 사람들도, 천관녀 설화는 어려서 들은 적이 없고, 장흥에서 발행되는 책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궁금합니다. 김형종님은 어려서부터 그 전설을 들으셨는지요? 제가 아는 장흥 분들은 들은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천관산의 천관녀 설화는 어느분이 구술한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설화로 기록이 남은 것은 언제인지요. 궁금합니다.
경주인님 안녕하십니까? 우리 장흥군을 다시 찾아주셔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난번 경주인께서 올리신 글의 답변을 올리면서,
佛書에 '지제산(천관산)은 천관보살이 사는 산'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였는데,
석전(釋典;불경을 말함)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보살에게 이르기를 해동나라 남쪽에 지제산이 있으니 천관보살은 그 권속(眷屬)들과 함께 거기서 상주하면서 법음(法音)을 연설하라 하였다(화엄경)는 기록(어디에 기록이 있는지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이 있습니다. 또한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천관녀에게 경주로 함께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천관녀 曰 '사실 소첩은 천관보살이 화신한 몸으로... (이하생략)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경주인께서 말씀하신 장흥 천관산의 천관보살은 부처님과 관계된 인물이며, 김유신장군의 설화에 등장하는 천관보살과는 상이한 인물이다는 말씀이 지당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관'자의 한자표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인물일지라도 전해오는 설화는 김유신장군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얘기로 어떤식으로든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어디에 그러한 기록이 있는지를 설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답변으로 경주인님께서 물으신 설화의 기록에 대한 물음까지 답변이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천관산 기슭으로 풍광이 아주 수려합니다)에서 출생한 존재(存齋)위백규(魏伯珪)는 조선실학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다산 정약용보다 35년 먼저 태어난 호남실학의 巨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존재선생(1727~1798)은 생전에 정치,경제,치세, 경학,의학, 지리,천문 등 다방면에 걸쳐 약 90여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중에 존재선생의 나이 53세 때 저술한 지제지(支提誌)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천관산의 불교사적과 산천에 얽힌 설화, 고기록(古記錄)과 구전의 일화, 역사 등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이 책에 위에서 언급한 '불서에 지제산에는 천관보살이 사는 산'이란 기록이 있습니다. 존재선생이 저술한 '산중고기(山中古記)'나 '경주유사(慶州遺事) 등 많은 책들은 현재 전하지는 않고, 이러한 책들을 저술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호남지방에 흉년이 들어 지금으로 풀이하면 대통령의 특사가 호남의 실정을 파악하러 왔다가 존재선생의 이름을 알게되어 저술의 일부를 조정으로 갔기 때문이라 합니다 (지금은 기억이 없지만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은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알게 된 왕명으로 짧은 기간 벼슬도 지내게 됩니다.
여하튼 김유신장군에 관한 설화(장흥지방과 연관있는)가 경주유사에 있었다고 합니다만 안타깝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경주인님께서 구술인가, 어려서부터 들었냐고 물으셨는데 공교롭게도 저의 외가나 처가가 모두 '위'哥로 저는 어려서 몇 번을 들었으나 다른 장흥인들도 거의 알지 못하더군요.
다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김유신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져 온 것은 사실입니다. 저 또한 그냥 옛이야기로만 생각할 뿐 역사적으로 김유신이 장흥지방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러한 설화가 있었다는 것 입니다.
천관산에는 사찰과 암자의 수가 89개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불교와 인연이 많은 천관산인지라 인도(인디아) 왕국의 왕자와 관련하여 '아육왕탑'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참고로 천관산과 관련한 (설화의 얘기는 언급없이)기록이 서거정의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주인님께 다소나마 답변이 되었으면 합니다.
경주인님께서 말씀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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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모가대와 우기나와 함께 남산으로 말을 타고 올라갔다. 남산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에는 명활산, 서쪽에는 옥녀봉과 선도산이 길게 뻗쳐 있었고, 시가지에는 서천, 남천, 북천의 세 줄기 냇물이 비단 폭이 널린 듯하였다. 세 화랑은 신라의 훌륭한 인물이 되고자 약속했고,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세화랑은 남산 밑으로 내려와서 북문 밖에 있는 술집에 들렀다. 그 술집에는 젊은 기생이 하나 있었는데, 천관이라 하였다. 천관은 매우 영특해 보였다. 김유신은 그 뒤부터 천관이 있는 술집에 자주 들렀고, 김유신은 한낱 기생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천관으로 부터 많은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그러한 행동을 못 마땅해 하셨고, 김유신으로 부터 다시는 천관녀의 집에 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어는 날, 김유신은 잔치집에 초대를 받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말을 탔는데, 술에 취한 탓에 김유신은 말 위에서 흥얼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말은 저 혼자서 뚜벅뚜벅 걷다가 어느 집 앞에서 멈추었다. 김유신은 퍼뜩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 본 김유신은 정신이 번쩍 났다. 그곳은 천관의 술집 앞이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주인의 뜻도 모른다고 하여 오랫동안 함께해온 말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갔다. 얼마 뒤에 천관은 머리를 깎고 중이되었다가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뒷날,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곳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천관사지는 오릉 동쪽, 논 가운데 터만 남아 있습니다.
(자료출처 : 신라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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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아닌 전설이나 민담,설화 등에는 비합리성과 비과학적인 것이 대부분이며 거기에는 어떤 근거나 증명(證明)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장흥에 천관산(天冠山)과 천관녀(天冠女)에 대한 전설은 어제 오늘에 이르러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며, 또한 어느시대, 누가,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알아낼 방법도 없습니다.
'경주인'님께서 적어주신 내용은 웬만한 사람은 모두가 알고있는 내용이고 장흥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즉, 말의 목을 벤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장흥군 대덕읍과 관산에 걸쳐 있는 천관산(天冠山)은 해발 723미터로 호남 5대 명산으로 손꼽는다. 옛날에는 지제산(支提山) 천풍산(天風山)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천관산으로 부른다.
佛書에 '지제산은 천관보살'이 사는 산'이란 기록이 있다.
이 기록과 관련하여 신라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에 사랑했던 천관녀(天冠女)가 숨어 살았던 산이라고 한다. 김유신이 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천관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 백마의 목을 베고 오직 무예에만 열중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는데, 이때 김유신에게 버림을 받은 천관기생은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암자를 짓고 숨어 살면서 김유신의 성공을 빌었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이 경주로 돌아가다가 천관녀의 소식을 듣고 암자를 찾아갔다. 김유신은 천관녀를 만나 함께 경주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으나,
"소첩과 장군의 인연은 소첩이 기생이었을 때 뿐입니다. 사실 소첩은 천관보살이 화신한 몸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시킬 사람을 찾던 중 장군이 적임자라 여겨져 시험한 것인데 역시 큰 일을 이룰 사람이라 소첩과 인연을 끊었으므로 제가 할 일은 이미 마친 것입니다"
말을 끝낸 천관녀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니 홀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를 타고 서쪽을 향해 사라졌다. 김유신이 그녀를 놓칠새라 말을 타고 뒤쫒았는데 결국 장흥의 천관산에 이르러 그녀를 잃어 버렸다. 이 때문에 천관산에 천관보살이 살고 있다고 전해온다.
참고로 제가 알기로는 경주에 있는 천관산은 장흥의 천관산과 한자의 표기가 다른 것으로(天官山) 알고 있으며, 천관녀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기생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을 돕던, 요즘으로 말하면 무당이나, 단골의 일을 했던 직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당연히 화랑들과의 접촉이 빈번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고 '사건'도 있었지 않았겠냐 하는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가 되기를 바라오며 저는 문화와 문학에 관심이 많은사람으로 장흥군의 공식적인 답변이 아님을 밝힙니다. 장흥군민의 한 사람으로 장흥군에 보여주신 '경주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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