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무용총 벽화를 본뜬 벽면이 일품이었던, 지금은 사라진 충장로 1가'고구려호프' 주방에서 본 그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컵을 씻으며, 그는 칸트를 읽고 있었다. 동행했던 친구가 그를 소개했고, 그와 500cc 호프 한잔을 나누며 아마도 기형도를 이야기했던 것 같다. 7년전이었던가, 8년전이었던가, 정확한 세월은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때 그는 30대 중반의 총각이었고, 부지런히 시만 쓸 뿐 시집을 내거나 어딘가에 투고하는 일은 하지 않는, '명함없는' 시인이었다.
금년 봄, 지역문단에서 발행하는 어느 계간지의 소설부문 신인상을 받는 동향 선배를 축하하러 간 자리에서 두 번째로 그를 만났다. 그에게는 시부문 신인상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른바 '명함있는' 시인이 된 것이다. 후덕한 인상의 아내(임선옥·37)와 김다산이라는, 눈매가 시원한 두살배기 딸이 그의 곁에 있었다. 불혹, 삶을 대하는 태도가 확고히 선다는, 혹은 서야 한다는 마흔 셋의 김효문씨였다. 그간의 삶이 궁금했다. 선배 축하를 뒷전으로 미루고 그날 그와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어쩌다 生을 방류하고 말았다 生이 빠져나간 둠벙의 마른 바닥에는 누더기에 둘러싸인 삐걱거리는 육신과 좋지 않은 몇 개의 추억과 가볍기 짝이 없는 하찮은 觀念의 부스러기가 발 밑에 버석거릴 뿐, (중략)
김효문·정진국 2人 시집 <유목일기> 중 김효문의 '노숙자'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한살 때, 그러니까 성인이 되던 해에 그는 오일팔을 경험했다. 사회적 의미의 生을 획득한 첫해 봄날, 시의 첫 문장처럼 그의 生은 방류되기 시작했다. 실존으로서 내가 아닌 어떤 다른 가치를 좇는다는 의미에서 '방류'일 터이고,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었으므로 '어쩌다'일 것이다. 아스팔트 한복판에 있거나, 감옥에 있거나, 아니면 술집에서 속울음을 울어야했던 잔혹한 낭만주의의 80년대 내내 그의 일터는 공장이었고, 집은 '청년조직'이었다. 실체가 없는 개념적 공간에서의 삶, 시의 진술처럼 20대의 그는 '노숙자'였다.
민주화의 봄기운이 스멀거리던 90년대에 그는 유목민이었다. 우리콩을 이용한 두부와 된장을 만들었고(장성), 비탈진 산자락에서 염소를 키운 적도 있었으며(광양), 재래의 방식을 이용해 죽염을 굽기도했다.(화순) 좋은 추억 몇 개를 남겼을 뿐, 그 일들이 그에게 준 것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 당초 그의 觀念에 그런 말들은 없었다. 그의 삶을 지탱해주었던 것은 '하찮은 觀念'에 불과한 시, 그뿐이었다.
성과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큰 성과가 있긴 했다. 죽염제조공장에 견학 온 충청도 노처녀와 눈이 맞은 것이다. 노처녀는 죽염보다 그에게 더 정신이 쏠렸고, 그 쏠림을 알아차린 그는 그녀에게 죽염을 이야기하지 않고 에리히 프롬을 주절댔다. 이듬해 그이들은 총비용 37만원이라는 경이적인 금액을 들여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혼여행은 땅끝과 다산초당 배낭여행으로 대신했고, 화순군 남면 다산마을 빈집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는 시를 계속 썼고, 많은 시들이 태어나자마자 쓰레기통으로 방류되었다. 90년대 마지막 1년의 풍경이다.
달걀을 팔아 양식을 댔다. 자연방목한 암탉 무리에 수탉을 넣어 만들어내는 유정란이다. 유통업체에 납품을 하기도 하지만 직거래의 비중이 더 크다. 약간의 사료를 먹이는 것 외에는 어떠한 편법도 쓰지 않는다. 그나마 사료의 '비자연성'을 염려해서 숯가루를 타서 먹인다. 낮은 현금수입을 검소한 삶으로 메우고, 삶을 억압하는 노동은 하지 않는다. 더 많은 수입을 위해 비인간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접점에 그의 최대수입, 최대노동이 있다. 월평균 60만원의 수입으로 그이들은 살고있다. '거리의 시대'가 마감된 2000년대, 그가 80년 봄날의 정신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001년 6월,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태몰로 '닭의 터전'을 옮겼다. 보림사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2km 쯤 올라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그의 집이 있다. 서른 여섯의 나이로 지난해 가을에 요절한, 민중미술의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 김오중씨가 머물렀던 집이다.
닭의 터전이 그이들에겐 곧 삶의 터전, 하지만 닭을 볼수가 없었다. 화순에서 이사온지 한달, 닭의 이사는 8월2일이라고 한다. 그래도 할일은 아주 많다. 집과 함께 얻은 묵은 밭들을 정돈해야 하고, 내년이면 짓게 될 열마지기쯤 되는 논농사 준비도 해야 한다. '노동접점'의 수위가 약간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처음에 그가 그은 '최대수입, 최대노동' 線이 너무 낮았다는 진단이 옳을 것이다.
이제 정착민이 되었다는 징후일까, 시가 잘 써지지 않는다고 한다. '유목' 이후의 '정착'이 쉽지만은 않다는 고백이다. 어쨌든 그는 쓰고 있다. 컵을 씻으며 칸트를 읽는 모습처럼, 그는 달걀을 닦으며 시를 쓴다. 학문과 노동, 시와 노동, 음악과 노동… 그는 소위 고상한 쪽으로 분류되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노동이 함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야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본인의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 정착민이 된 그가 보여준 2001년 여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