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릴한 스릴이 넘치는 그곳
- 작성일
- 2001.09.25 08:07
- 등록자
- 다OO
- 조회수
- 2298
픽션 1)
나?
대한민국의 성실한 납세자이며, 국방의 의무를 5년이나 다한
예비역 육군장교이고, 45세의 인물좋은 중년. 사람들은 나를보고
뺀질한것이 얼굴에 기름끼가 넘친다고 한다.
물론 그말은 내가 잘생겼다는 뜻이겠지.
주민등록증?
지난해 동사무소 한쪽 구석에서 찍은 사진으로 반짝이는 코팅까지
입힌 찡은 나의 얼굴을 못쓰게 만들어 놨지만 낸들 어쩌겠어.
정부서 하는일이니 군말없이 가만 있어야지.
인감?
일년에 한두번정도는 꼭 인감 뗄일이 있더라고.
그리고. 3년에 한번정도는 꼭 인감도장 분실했고.
오늘도 나는 대출 연장건으로 연례행사처럼 인감을 떼러 왔지.
나는 항상 그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에 한껏 머금고 동사무소를
들어섰다. 일년에 한두번 들르는 동사무소에 아는 얼굴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짜는것보다야 웃는게 나을것 같아 아무생각없이
웃어 본것이다.
민원창구 앞의 여직원이 곁눈질로 힐끗 바라본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내가 자기쪽으로 오지않기를 바라는 눈치다.
설마......
"아가씨 인감한통 떼러 왔는데요."
"신청서 작성 하시고, 인감도장을 제게 주시고,
주민등록증이나 신분확인 가능한 증명서를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내가 본인인지를 확인해야지.
나는 지갑을 꺼내서는 언제봐도 기분나쁘게 희미하고
실물보다 못한 그 사진이 박힌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직원의 눈이 이상하게 변한다.
그리고는 본인이 맞느냐고 묻는다.
그래. 내가봐도 엿같이 만든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보면
기겁하는데 니가보면 오죽 하겠니.
"저......사실은 주민등록증 사진의 해상도가 시원찮고
제가 최근 헤어스타일을 바꾼데다가 일년 전부터 운동을 했더니
볼에 살이 빠져서 약간 다르게 보일뿐입니다."
"바쁘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빨리 좀 떼어 주십시요."
나는 마침 약속시간도 다되어가고 동사무소 창구 여직원과
실랑이 하는것도 귀찮아서 빨리 이자리를 벗어 나고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여직원이 이번엔 자신의 상사를 부른다.
그리고는 둘이서 뭐라고 쑥덕 거리더니 그 총무담당이라는
작자가 내가 확 돌아버린 결정적인 말을 한것이다.
"저.... 이거 정말 죄송 합니다만 주민증의 사진과 실물이 너무나
상이하니 본인임을 확인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정말 죄송 합니다. 왠만하면 그냥 떼어 드리고 싶은데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저희들은 대를물려 갚아도 못갚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거든요."
이거 정말 어이없다.
내가 나인지 증명을 하라니.
내 마누라와 애들까지 불러와서 내가 나라고 말하면 그때는
내 마누라가 내마누라 맞는지 증명하라 할것이고, 내 애들은
내애가 맞는지 증명하라 할것인데 무슨수로 내가 나임을
증명한단 말인가?
"이것보쇼.
사람이 좋으면 다 좋은줄 아시는가 본데.
내가 이래뵈도 주민증보면 아시다시피 육군장교 출신에다
세상 살면서 하찮은 벌금형도 하나 없는 사람이 올시다.
거...민쯩 사진좀 얽었다고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데
이러지 맙시다.
증명할려면 당신들이 내가 난지 아닌지를 증명 해야지
내가 왜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 된단 말이요."
내가한 말이지만 너무나 멋진 반박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우쭐 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실랑이 하기를 상당여. 나는 할말을 잃었다.
파출소 순경이 권총과 수갑을 옆구리에 차고
동사무소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안타까운듯한 눈빛을 하며 내게 말한다.
"선생님. 저도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은데요.
선생님을 임의동행해서 사실여부를 확인 해야겠습니다.
제가봐도 신분증의 사진은 선생님과 다르게 보이는군요."
이쯤되면 성한 사람은 누구나 미쳐버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수없이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끓어 넘치는 분노를
삭일 수 없었던 나는 드디어 알량한 지성이니 이성이니하는
허울들을 내던지고 과거 군대생활 할때의 그 무지막지했던
싸나이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고 말았으며,
말씨도 어느새 친근한 경상도 싸투리로 변해 있었다.
"이것들이 보자보자하니까 꼴깝을 아주 다방면으로 떨고있네.
야 이놈들아 내가 어디가 거짓말이나하는 사깃꾼같아 보이냐? 응?
더런 인감한통 뗄려는데 사기꾼 취급하능거 보이 인감 세통
떼려했으면 살인자 취급 할뻔했네?
그래 니가 경찰이냐?
이 동사무소에서 하루에 인감 몇통이나 떼주는지 몰라도
니는 마 파출소에서 근무하지말고 맨날 동사무소에 인감떼러
오는놈들 뒷조사나 해라. 자쓱아.
순 나뿐놈들 아이가. 비싼 월급 쳐받고 할일이 없응께
별 희한한 일을 다하고 자빠졌네.
에이 더러워서 내가 인감 안떼면 안뗏지 이짓은 몬한다."
결국 나는 주민쯩보다 잘생겼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동사무소를
발칵 뒤집어 놓고 파출소 순경의 안내를 받아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기에 이러렀다.
정말 세상 살다살다 이런일도 있을까?
기가차서 말도 안나오고 뭣달린 사내놈만 아니라면 땅을치고 펑펑
통곡이라도 하고싶건만 너무나 당연한듯이 나를 조사하는 경찰을
보니 성질대로 할 말 다못한게 억울해서 눈 사이로 삐집고 나온던
눈물 찌꺼기도 쏙 들어간다.
그때 어디선가 낮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렇다. 그는 바로 나의 사랑스러운 대학동기였다.
그를 이런곳에서 만날줄이야.
새끼.. 나타날려면 조금만 빨리 나타나지. 그래도 기뻣다.
그의 어깨에 반짝반짝 빛나는 무궁화 계급장은 그가 이 파출소의
소장이란것은 말안해도 다 아는일.
그와 반가운 악수를 나눈지 불과 10분뒤에 인감증명서 한통을 뗀것은
물론 동사무소 직원과 총무담당 그리고, 파출소 직원의 거의 90도에
가까운 사과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호탕한 사람인양 연신
"그럴수도 있지요."를 연발했다.
그러나, 나는 억울했다. 이미 한시간 가량 빼앗긴 시간이 아까웠고,
사기꾼 취급 받은걸 생각하면 한대씩 쥐어박고 발차기로 옆구리를
질러버린후 마무리로 아구창이 확 돌아가게 날리지 못하는 현실이
나의 성질을 들끓게 했다.
그러나, 어쩌랴. 다 끝난 일인데.
이후 내가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바꾸기위해
쯩을 바꾼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동사무소에 인감떼러 갈때에는 항상 사진의 모습과
비슷해질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는 버릇이 생겼다.
(픽션 2)
나?
50대 1의 경쟁륭을 뚫고 당당하게 지방공무원임용시험에 합격하여
9급으로 공직생활한지 3년째 접어드는 초보라면 초보 공무원이고
노련미라면 남보다 뒤지지않는 팍팍튀는 신세대로서 동사무소에서
근무한다.
업무?
주민등록 및 인감증명발급업무.
1년동안 선배 공무원들로부터 무수히 들은말이라고는
"민원인을 일단은 도둑으로 보라"였으며 그 이외의 충고는
받아 본적이 없다.
나는 수많은 동민들중 일명 위험인물들을 줄줄이 기억속에
꾀어차고 있으며, 과거 기상천외하고 아슬아슬했던 인감사고들을
전설로 외우고 있다.
주민등록증?
행자부에서 바꾸라고 하는바람에 공공근로사업자를 사진사로
임명하여 딴에는 민원인들 얼굴 잘나오게 할려고 대학에서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던 사람으로 고르는 성의를 보여서까지
최선을 다해 새로운 쯩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날도 점심식사를 마치고 눈두덕을 내리누르는
눈꺼풀에 애써 힘을주고 있었다.
이거야 원. 민원실이라고는 코딱지만한 유리새장처럼 생긴곳에
처녀혼자 덩그러니 쭈그리고 있으니 신세가 한탄을 넘어 절망의
폭포로소이다.
어제저녁 주민등록 대사작업으로 밤12시까지 엉겨붙은걸 생각하면
오늘은 정말로 별일없이 넘어갔으면 하는 바램만 간절하다.
동사무소 정문 앞으로 한 중년인이 들어온다.
머리에 기름을 쫙 바른것이 사기냄새가 풍기고,
음흉스런 웃음까지 짓는걸 보니 꽤나 해본 솜씨인가보다.
제발 인감떼어달란 소리만은 하지마라. 그러면 너는 사기꾼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런데 역시 내눈은 못속여.
내앞으로 다가온 그는 영락없이 인감 한통을 요구했으며,
나는 아주 명확한 발음으로 도장과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주민등록증속의 삐리한 청년은 지금 내눈앞의 뺀질한 중년인과는
너무나 상이한 사람인걸.
드디어 그 말로만 듣던 사기꾼을 내가 만나고 말았구나.
가슴이 콩딱 거리는게 무슨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된것처럼
설레이기까지 한다.
내가 드디어 그 흉칙한 인간사기꾼을 잡는구나.
선배들이 몇억씩 사기당하고 눈물로 공직을 떠났으며,
정부마져도 적극적으로 공무원 보호하길 외면했던 인간사고의
현장을 나는 명석하고 신속한 판단력으로 잡아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즉시 사실을 총무담당주사와 상의하고 본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저 선생님! 신분증의 사진과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러는데요.
선생님께서 본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나는 역시 저번달 친절공무원상을 받은 모범공무원답게
친절하게 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나의 추측을 뒷바침이라도 하듯이
그가 미친개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마치 들켰으니 험악한 분의기로 이 위기를 넘겨 보겠다는것이 아닌가?
가증스러운것 같으니라고. 드디어 본색을 드러 내는구나.
그의 발광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는 더해갔다.
뒷쪽에서 담당주사가 파출소로 전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미친개의 발광을 은근히 즐기면서 간혹
"선생님 억울해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그의 성질에 기름을
부어댔다.
더욱더 미치도록......
한참이 지나서야 인근 파출소 직원이 당도했다.
그의 얼굴에는 "오늘에야 공문서를 위조하려는 더러운 사기꾼을
현행범으로 잡아 한건 하는구나" 하는 기대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경찰을 본 민원인은 거의 까무라치기 직전이다.
역시, 사기꾼들은 자심의 사기행각이 발각되면 그 위기를
모면하기위해 온갖 작전을 다쓴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그의 광분하는 행동은 경찰의 연행을 합리화 시켰으며 파렴치한
사기꾼 한명은 그렇게 붙잡혔다.
아!!!!
인감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피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선배공무원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의 그 한을 오늘에야 되갚고 말았습니다.
더럽고 추잡한 사기꾼 감별법인 선배님들의 충고를 성서로
생각하고 이제껏 근무신조로 삼아온 그 결실을 이제야 보게 되는군요.
저는 이 날에 대비해서 수백일을 노심초사 불안한 마음으로 이 자리를 지켜왔으며 오늘 결국 승리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나의 뛰어난 판단력에 너나 할것없이 박수를 보냈으며, 도적놈을 때려잡은 공을 높이사서 앞다투어 술을 사겠다고 아우성이다.
한참이나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이전의 상황을 리바이블하며 사무실 중앙에서 개거품을 물고 있는데.
"딩디딩 딩딩딩"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총무담당주사는 얼굴이 똥빛으로 바뀌더니
조용히 나를 불렀다.
"김주사. 우리는 인자 죽었다. 아까 그 사기꾼이 본인이란다.
그라고, 파출소장 고등학교 동창이란다. 가서 대가리 숙이고
싹싹 빌 준비나 하자.
오늘 신문에 58년생 일진이 사납다 쿠더마 이런일이 생길라꼬
그랬능갑따. 우짜것노."
물론 파출소에서 손이 발이되도록 빈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내 평생 그렇게 미안하고 쪽팔린적은 없었다.
파출소 직원도 덩달아 미안한지 연신 고개를 숙여대고 있었다.
어쨌던 일진 더러운 날임에는 틀림없다.
파출소 문을 나서면서 우리 담당주사가 말했다.
"김주사. 그래도 우리가 그사람한테 한짓에 비하모 이만하기 다행이제.
까딱 잘몬했시모 청와대에 진정 들어가고 개값 물어줄뻔 안했나.
아까 글마가 죽어도 본인이라꼬 쌔쿰시로 내 멱살을 잡았을때 확
귀싸대기를 때리삘라 캤는데 이순경이 들어오는 바람에 헛빵 했다
아이가.
니 몰랐째?
가자. 가서 술이나 한잔 빨자.
높은놈들이 인감은 뭣한다꼬 맨들어서 사람을 뱅신 만드노.
차라리 경찰서에서 인감떼어 주던가 청와데에서 떼주능기 훨씬 낫것다.
안 그라모 동사무소에 초고속 지문 감식기 한대씩 보급하던가."
나의 평범한 인생은 그렇게 또 한번의 기억을 남겼다.
요즈음 인감떼러 오는사람들을 감별하는 나의 수준은 거의 프로급이다.
얼굴 모양새를 살피는 수준을 넘어서서 얼굴뼈의 골격까지 감별해내는 수준은 인체해부의사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자부한다.
지문감식기 이젠 필요없다.
인생사 다 도박이니 잭팟에 판돈던진 기분으로 나는 오늘도 민원실을
들어선다.
짜릿한 스릴이 넘치는 그곳으로......
그래도 욕먹고 싹싹 비는것이 십수억씩 쌩돈 갚아주는것 보다야
낫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