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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현감을 전라좌수사로 발탁한 류성룡<인사가 만사다>
- 작성일
- 2019.01.09 14:53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2667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고 그를 발탁한 서애 류성룡은 3살위의 동네형으로 죽마고우친구이기도 했다. 어릴적 외가인 아산으로 내려가 성장했다.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큰형 희신에는 네 조카 뇌(雷), 분(芬), 번(蕃) 그리고 완(莞)이 있었고, 작은형 요신에게는 두 조카 봉과 해가 있었으나, 두 형이 모두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들 여섯 조카를 돌보아야 했다. 그는 조카들에게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였다고 한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方震)이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 방씨에게 청혼해서 결혼하였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方震)의 격려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방진으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원래는 문과를 지원하려 했으나 장인의 권유로 11년만인 32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이순신장군의 보석처럼 빛나는 명언은 문과 공부에 열중했던 것에 기인한다《충무공이순신전서》의 ‘방부인전’에 방진(方震)의 활솜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보성군수 방진은 재력가였고 조선의 3대 神弓이다.
왜놈들이 부산앞바다에 출몰해 임란을 일으키기 하루전 이순신장군은 모든 훈련,전력을 다갖추고
대기중이었다.임란을 막아내 나라와 민족을 구한 성웅이순신장군의 유비무환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이순신을 파격발탁한 서애나 그의 장인 방진의 선견지명도 후대 길이길이 기억해야할 자랑거리다. 38세 때인 발포 만호 시절의 첫 파직을 시작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47세 때 전라좌수사(정3품)로 발탁되기 직전의 벼슬은 정읍 현감(종6품)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격, 가치지향적 인생을 산 대가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불차탁용’이라는 특별인사제도에 의해 이순신은 하루아침에 오늘날 소장급 함대 사령관에 해당하는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돼 7계급 특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관심있게 볼점은 안중근장군님이 뤼순감옥 일본인 간수 지바도시치에게 선물한 유묵'爲國獻身軍人本分 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2번의 백의종군과 모진 고문속에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이순신장군과 동양평화와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원흉 이토오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자격으로 처단한 안중근장군, 어찌 이리도 빼닮았는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이 두聖人의 근간에는 애민정신이 자리한다.
이순신의 흔들리지 않는 人民에 대한 충성심은 두 번의 백의종군을 겪는 고행을 통해 더욱더 두드러진다.
녹둔도의 둔전관으로 있을 때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하여 그들을 격퇴시켰고,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허위 보고로 인해 첫 번째 백의종군을 당했다. 억울하고 불공정한 판결이었지만 이순신은 이를 준수하였고 그것을 묵묵히 감수했었다.
또한 이순신이 종전의 해전을 전승으로 이끌며 전세를 역전시킨 공적에도 불구하고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중앙으로 압송돼 투옥된 채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러나 이순신은 항변으로 다른 사람을 연관시키거나 조정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후 정탁의 상소로 인해 죽음 직전에 풀려나온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으로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승전의 포상은 고사하고 조정과 임금을 업신여기고 전쟁에 태만한 죄로 모진 백의종군의 치욕과 고행을 수행해야 했던 이순신은 그것들을 묵묵히 감내해 나갔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부당한 처벌을 인내와 침묵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유는 오직 전란에서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애국,애민의 일념 때문이었다. 이는 충 사상의 절정이자,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선 충성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충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도 있다.이순신장군의 忠은 백성을 향하고 있다 할것이다.
이순신이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가 근무하는 동안 숙소에는 옷과 이부자리만을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으며 남은 양식은 반드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병마절도사가 이순신에게 다른 군관의 집을 사사롭게 찾아보자고 했을 때에도 이순신은 상관의 잘못을 지적하며 거절했고 병마절도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며 상관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지적하는 모습은,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충사상(忠思想)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전라남도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로 근무하던 때, 그의 직속상관이 되는 전라좌수사 성박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 이순신의 이러한 公私에 대한 분명한 태도는 성박을 감복시켰다. <불법부당한 지시에 단호히 거부하는 영혼이 존재하는 공직자의 모범적 사례라 할수있다>
이순신의 또다른 리더십의 좋은 예가 또 있다.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시켜버린 조선수군을 불과 47일 만에 재건하여 전세계
해전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량해전<13척對130척또는 330척>을 승리로 장식한다. <참고로 진해 해병대훈련소를 마치고
해남우수영,진도벽파진,어란포,장흥회진은 필자가 33.5개월동안 해경경비정을 타고 군복무했던 인연이 깊은곳이기도 하다.해남우수영 근무중에 진도대교 공사가 한창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교지를 받은 날이 1597년 8월 3일이고 명량해전은 9월 16일에 일어난다. 8월3일 진주 손경래 집을 나설 때는 군관 9명 병졸 6명이 전부였다.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5일 보성열선루에서 줄행랑전문 선조가 보낸 선전관 박천봉이 전달한 “조선 수군이 미약하니 육군에 의탁해 싸우도록 해라”라는 수군 폐지 내용이 적힌 유지를 받고, “전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고, 저는 죽지 않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장계를 올린 후에도 남해안 내륙연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병력과 군수품, 그리고 전선을 수습한다.
순천을 지나면서 병력 60명과 승병 300명을 얻었고,10여일을 머문 보성에서는 병력 120명과 600명의 장정이 1년간 먹을 식량도 확보한다.전임 보성군수 방진의 선정이 비빌 언덕을 마련해 준것이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수들이 정예병들을 이끌고 이순신의 휘하로 모여들었다.장흥 회령포 회령진성은 1597년 8월 20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께서 처음으로 조선수군 함대를 이끌고 해상전투를 위해 출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명량해전의 주전장인 울돌목 현장에는 13척의 이순신 함대 뒤에 100여척의 민간 어선단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뒤를 받쳐주었다. 온갖 음해와 모진 고문에 성치도 않은 몸으로 오직 구국과 애민을 실천코자 조선수군 재건의 고단한 발걸음을 걸었을 뿐이다.
영화 명량에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후 노를젓는 노꾼들끼리 이런 대사가 나온다."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것을 알아주까"
몰라주면 호로새키들이지"라고 말이다.과연 우리모두는 이 노꾼들의 바램에 충실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특별히 청렴도꼴찌를
연거푸 차지한 장흥군의 살림 살이인 혈세4000억원을 심의하고 집행하는 자들과 공직의 이름으로 祿俸을 받아먹는 이들이 누구보다 뼈아프게 새길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장흥군<의회,공노조포함>의 작태는 주권자 무시를 넘어 행정을 포기해버린것 처럼 보인다.아니 반성과 처절한 사죄없이 어찌
청렴도 꼴찌에서 벗어날수 있단 말인가.전임 김성군수시절에도 필자는 삼보일배와 사죄문발표,대군민토론회를 주창했으나 개무시로 일관해서 오늘날 또다시 청렴도꼴찌라는 고착화와 재반복의 우를 범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임란후 류성룡은 징비록을 써서 처절한 반성을 마다하지 않았다.징비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장흥군,군의회,공노조에게 요구한다.하루라도 빨리 처절한 자기반성과 사죄,이를 뒷받침할수있는 자구책을 마련해서 주권자제위께 보고하기 바라며 그리하여 행정환경도 장흥군의 대표네이밍인 "맑은물 푸른숲"처럼 바뀌길 기대해 본다.구호로 만 그치는 전시행정은 개나 줘야 한다.
부산면 꽃동네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왜놈들이 부산앞바다에 출몰해 임란을 일으키기 하루전 이순신장군은 모든 훈련,전력을 다갖추고
대기중이었다.임란을 막아내 나라와 민족을 구한 성웅이순신장군의 유비무환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이순신을 파격발탁한 서애나 그의 장인 방진의 선견지명도 후대 길이길이 기억해야할 자랑거리다. 38세 때인 발포 만호 시절의 첫 파직을 시작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47세 때 전라좌수사(정3품)로 발탁되기 직전의 벼슬은 정읍 현감(종6품)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격, 가치지향적 인생을 산 대가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불차탁용’이라는 특별인사제도에 의해 이순신은 하루아침에 오늘날 소장급 함대 사령관에 해당하는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돼 7계급 특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관심있게 볼점은 안중근장군님이 뤼순감옥 일본인 간수 지바도시치에게 선물한 유묵'爲國獻身軍人本分 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2번의 백의종군과 모진 고문속에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이순신장군과 동양평화와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원흉 이토오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자격으로 처단한 안중근장군, 어찌 이리도 빼닮았는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이 두聖人의 근간에는 애민정신이 자리한다.
이순신의 흔들리지 않는 人民에 대한 충성심은 두 번의 백의종군을 겪는 고행을 통해 더욱더 두드러진다.
녹둔도의 둔전관으로 있을 때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하여 그들을 격퇴시켰고,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허위 보고로 인해 첫 번째 백의종군을 당했다. 억울하고 불공정한 판결이었지만 이순신은 이를 준수하였고 그것을 묵묵히 감수했었다.
또한 이순신이 종전의 해전을 전승으로 이끌며 전세를 역전시킨 공적에도 불구하고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중앙으로 압송돼 투옥된 채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러나 이순신은 항변으로 다른 사람을 연관시키거나 조정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후 정탁의 상소로 인해 죽음 직전에 풀려나온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으로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승전의 포상은 고사하고 조정과 임금을 업신여기고 전쟁에 태만한 죄로 모진 백의종군의 치욕과 고행을 수행해야 했던 이순신은 그것들을 묵묵히 감내해 나갔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부당한 처벌을 인내와 침묵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유는 오직 전란에서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애국,애민의 일념 때문이었다. 이는 충 사상의 절정이자,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선 충성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충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도 있다.이순신장군의 忠은 백성을 향하고 있다 할것이다.
이순신이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가 근무하는 동안 숙소에는 옷과 이부자리만을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으며 남은 양식은 반드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병마절도사가 이순신에게 다른 군관의 집을 사사롭게 찾아보자고 했을 때에도 이순신은 상관의 잘못을 지적하며 거절했고 병마절도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며 상관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지적하는 모습은,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충사상(忠思想)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전라남도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로 근무하던 때, 그의 직속상관이 되는 전라좌수사 성박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 이순신의 이러한 公私에 대한 분명한 태도는 성박을 감복시켰다. <불법부당한 지시에 단호히 거부하는 영혼이 존재하는 공직자의 모범적 사례라 할수있다>
이순신의 또다른 리더십의 좋은 예가 또 있다.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시켜버린 조선수군을 불과 47일 만에 재건하여 전세계
해전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량해전<13척對130척또는 330척>을 승리로 장식한다. <참고로 진해 해병대훈련소를 마치고
해남우수영,진도벽파진,어란포,장흥회진은 필자가 33.5개월동안 해경경비정을 타고 군복무했던 인연이 깊은곳이기도 하다.해남우수영 근무중에 진도대교 공사가 한창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교지를 받은 날이 1597년 8월 3일이고 명량해전은 9월 16일에 일어난다. 8월3일 진주 손경래 집을 나설 때는 군관 9명 병졸 6명이 전부였다.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5일 보성열선루에서 줄행랑전문 선조가 보낸 선전관 박천봉이 전달한 “조선 수군이 미약하니 육군에 의탁해 싸우도록 해라”라는 수군 폐지 내용이 적힌 유지를 받고, “전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고, 저는 죽지 않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장계를 올린 후에도 남해안 내륙연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병력과 군수품, 그리고 전선을 수습한다.
순천을 지나면서 병력 60명과 승병 300명을 얻었고,10여일을 머문 보성에서는 병력 120명과 600명의 장정이 1년간 먹을 식량도 확보한다.전임 보성군수 방진의 선정이 비빌 언덕을 마련해 준것이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수들이 정예병들을 이끌고 이순신의 휘하로 모여들었다.장흥 회령포 회령진성은 1597년 8월 20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께서 처음으로 조선수군 함대를 이끌고 해상전투를 위해 출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명량해전의 주전장인 울돌목 현장에는 13척의 이순신 함대 뒤에 100여척의 민간 어선단이 자발적으로 동참해 뒤를 받쳐주었다. 온갖 음해와 모진 고문에 성치도 않은 몸으로 오직 구국과 애민을 실천코자 조선수군 재건의 고단한 발걸음을 걸었을 뿐이다.
영화 명량에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후 노를젓는 노꾼들끼리 이런 대사가 나온다."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것을 알아주까"
몰라주면 호로새키들이지"라고 말이다.과연 우리모두는 이 노꾼들의 바램에 충실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특별히 청렴도꼴찌를
연거푸 차지한 장흥군의 살림 살이인 혈세4000억원을 심의하고 집행하는 자들과 공직의 이름으로 祿俸을 받아먹는 이들이 누구보다 뼈아프게 새길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장흥군<의회,공노조포함>의 작태는 주권자 무시를 넘어 행정을 포기해버린것 처럼 보인다.아니 반성과 처절한 사죄없이 어찌
청렴도 꼴찌에서 벗어날수 있단 말인가.전임 김성군수시절에도 필자는 삼보일배와 사죄문발표,대군민토론회를 주창했으나 개무시로 일관해서 오늘날 또다시 청렴도꼴찌라는 고착화와 재반복의 우를 범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임란후 류성룡은 징비록을 써서 처절한 반성을 마다하지 않았다.징비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장흥군,군의회,공노조에게 요구한다.하루라도 빨리 처절한 자기반성과 사죄,이를 뒷받침할수있는 자구책을 마련해서 주권자제위께 보고하기 바라며 그리하여 행정환경도 장흥군의 대표네이밍인 "맑은물 푸른숲"처럼 바뀌길 기대해 본다.구호로 만 그치는 전시행정은 개나 줘야 한다.
부산면 꽃동네에서 반민특위 안명규